나탈리 사로트의 자전적 초상, 감각의 결을 따라가면 어린 시절이 다시 말을 건다.
『향성』은 기억과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를 정밀하게 복원한 문학의 내밀한 실험이다.
1. 서론: “내가 겪은 모든 순간은, 정말 내 것이었을까?”
나탈리 사로트의 『향성(Enfance)』은 자전적 기억을 ‘이야기’가 아닌 대화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성숙한 ‘나’와 어린 ‘나’를 번갈아 세워 기억을 의심하고 검증한다.
이 글에서는 그 방식이 왜 혁신적인지,
그리고 독자로서 우리에게 어떤 해방을 주는지 탐색한다.
“기억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어. 하지만 ‘사실이 아니면’ 더 솔직해질 수 있어.”
— 사로트의 화법이 내게 건네는 첫 인사
2. 본론 첫 번째 주제: 기억이라는 불안정한 무대 위 대화극
사로트는 전통적 회고록 서술을 거부하고, 성인 화자와 어린 화자를 교차시키는 ‘극적 대화’ 형식을 택한다.
2.1 기억 속 ‘나’를 호출하는 두 화자
- 성인 화자: 의심 많고 비판적, “이건 분명 왜곡일 거야.”
- 어린 화자: 감각적이고 단순, “그땐 정말 무서웠어.”
- 두 화자는 증인과 피고처럼 서로를 심문한다.
이 과정을 통해 독자도 증언대에 서게 된다.
“나는 내 과거를 얼마나 믿는가?”— 책이 던지는 질문은 곧 내 질문이 되었다.
2.2 ‘썰기’ 기법: 기억을 잘라내고 뒤집다
- 사로트는 한 장면을 여러 번 슬라이스해 보여준다.
- 반복‧수정‧부정이 이어지며 기억은 결코 고정되지 않는 영상이 된다.
- 읽는 동안 나 역시 학창 시절 한 장면을 수차례 리와인드하는 듯한 현기증을 맛봤다.
“기억은 편집 가능한 필름이다.”
사로트는 이 명제를 텍스트로 증명한다.
3. 본론 두 번째 주제: 감각과 언어—‘냄새’가 먼저였고, ‘단어’가 나중이었다
『향성』이라는 제목처럼, 어린 사로트에게 세계는 언어보다 향과 색으로 다가온다.

3.1 언어 이전의 감각 기억
- 빵 껍질 냄새, 습한 나무 냄새, 모스크 향 …
- 단어를 얻기 전의 감각은 덩어리 채로 존재한다.
- 사로트는 그 덩어리를 문장 사이 빈틈에 집어넣어 독자가 직접 맡게 한다.
3.2 언어가 달라지면 과거도 달라진다
- 러시아어·프랑스어 이중어 환경—번역되는 순간 감정도 번역된다.
- 기억 속 대사는 종종 언어를 바꿔 흔적만 남는다:
- “Mamochka…” → “Maman…” → “…엄마.”
- 번역 과정에 깃든 미묘한 ‘미끄러짐’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의 촉감이다.
4. 본론 세 번째 주제: ‘나’를 해체하면 비로소 드러나는 공동체적 외로움
사로트는 개인 회고록을 쓰면서도, 톨스토이가 말한 ‘모든 불행한 가족’의 그림자를 비춘다.
그러므로 『향성』은 철저히 내면적이면서도 보편적 고아 서사로 읽힌다.
어린 화자는 부모의 이혼, 이민, 전쟁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성인 화자는 그것을 사회적·역사적 구조로 재배치한다.
두 목소리가 겹칠 때, 독자는 개인사·근대사·세계사가 한 점에서 만나 뿜는 공기를 느끼게 된다.
“모든 기억이 사적 감옥이라면, 그 감옥의 설계자는 사회다.”
—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사로트의 텍스트에서 같은 회로를 발견했다.
5. 결론: 회상의 목적은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다시 쓰는 일
『향성』은 “내가 누구였나”를 묻는 대신 “나는 지금 무엇을 믿는가”를 묻는다.
기억을 의심하는 과정은 곧 현재의 자아를 확장하는 문학적 실험이다.
- 감각을 복원하며 현재의 언어를 재훈련하고,
- 의심을 개입해 기억의 독재를 막는다.
그러고 나면, 뒤늦게라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과거는 완벽히 진실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함 때문에 오히려 살아 있다.”
6. 마무리: 당신의 ‘향성’은 어떤 냄새로 남아 있나요?
책장을 덮은 뒤 생각했다.
쇠 냄새 가득한 운동장, 빗방울 섞인 흙냄새, 엄마 코트에 배었던 단 냄새…
내 어린 시절도 언어 이전의 향으로 남아 있었다.
여러분은 어떤 ‘향’을 기억하시나요?
댓글로 당신의 냄새, 당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세요.
기억은 나눌수록 새로운 언어로 진화하니까요.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제인, 생을 위한 레시피』 – 감각적 기억과 음식의 언어]
- [『나무를 심은 사람』 – 개인의 경험이 세계를 바꾸는 방식]
- [『작별하지 않는다』 – 기억과 상실을 직조해내는 한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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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Nathalie Sarraute
1900년, 모스크바 근교 이바노보에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때 이혼한 부모의 집을 오가며 유년기를 보내다가 1909년 프랑스로 망명한 아버지를 따라 파리에 정착한다. 파리에서 문학을, 옥스퍼드에서 역사학을, 베를린에서 사회학을, 다시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1925년부터 변호사로 근무한다. 그즈음 프루스트, 조이스, 울프 등의 작품을 접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1932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한동안 변호사 활동과 병행한다. 그러나 1940년 반유대주의 정책에 따라 법정에 설 수 없게 되자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뒤, 1999년 타계하기까지 글쓰기 및 문학 관련 강연에 전념한다. 첫 작품 『향성』(1939)부터 마지막 작품 『열어요』(1997)에 이르기까지, 여러 소설과 극작품을 통해 언어로 포착하기 힘든 미세한 심리적 움직임을 추적하는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또한 평론집 『의혹의 시대』(1956)를 통해 소설의 형식 및 주제에 관한 혁신적 문제의식을 고취하면서 1950년대 누보로망의 발흥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한다. 소설 『황금 열매』(1963)로 국제문학상을 수상하고, 1969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생전에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를 통해 「작품 전집」(1996)을 출간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